Akamig

Music2022-03-20T10:00:53.710ZRev.2

Giorgio by Moroder, 녹음 전체 번역

제 이름은 조르조 모로더고요, 저는 1940년 4월 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마을은 돌로미티 산맥에 있고요,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곳에 있어요. 고향 마을 사람들은 반은 독일어, 반은 이탈리아어, 반은 라딘어라고, 상당히 특이한데 이탈리아어랑 프랑스어랑 비슷한 오래된 언어를 썼었어요. 어릴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절 주로 Hansjörg라고 부르셔서 아직도 마을에 가면 사람들이 저한테 Hansjörg라고 부르곤 하는데 사실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지요. 그래서 태명인 조르조, 또는 지오바니 조르조를 썼는데 하지만 그건... 그건 너무 길잖아요? 그러니 이름 반만 써서 조르조인거죠.

제가 살던 곳은 외부세상과 단절된 작은 마을이었고, 그래서 제가 음악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건 순전히 우연이었답니다. 제가 열 다섯, 열 여섯살쯤에 기타를 치기 시작했을때부터 전 분명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어요. 왜냐면, 그게- 꿈이 너무나 크기도 했고 별다른 기회을 보지도 못했거든요. 작은 마을에 살면서 공부도 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학교에서 벗어나서 뮤지션이 되었을때 "좋아, 이제 기회가 좀 생긴걸지도 모르겠군." 이라고 생각했죠. 왜냐면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음악이었고, 그저 음악을 연주하는 것 뿐 아니라 작곡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학교에서 마지막 기말고사를 보려고 기다리던 때였어요. 언제였냐면 아마 6월쯤이었던것 같은데, 누군가가 와서는 프로 뮤지션이 되보지 않겠냐고 제의가 왔어요. 크리스마스에 일이 있는데 기타리스트가 필요하다더군요. 그래서 나쁜 짓이지만, 저한테는 좋았던 일을 했어요, 시험 봐야할 날에 시내에 간거죠. 아침 8시에 어머니가 절 깨우러 오셨을때 저는 "시험보러 가기 싫어요, 시험 안보면 1년 꿇어야 될텐데 1년 더하게 된다면 정말로 끔찍할거에요." 그리고 "좋아요, 저는 1년 다시 공부하기 싫고 뮤지션이 되고 싶다고요" 라고 말했죠. 그게 제가 뮤지션이 되기로 결심한 계기랍니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몹시 화가 나셨죠. (웃음) 그치만 마침내 제가 19살이 됐을때 독립해서 살게 됐고. 그렇게 저는 소위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첫번째 작곡가 겸 싱어로서 녹음은 말이죠, 에- 친구랑 함께 우리한테는 모노 레코더가 있었고 저는 기타를 연주하고 다른 애는 드럼 대신 식탁을 치고 또다른 애는 옆에서 박수 치고, 그렇게 첫 곡을 녹음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 아마 아직도 이탈리아에 그때 녹음한 45 디스크(45 RPM LP판)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을거에요. 다음에 가서 커피 한잔 사야지요. 뮤지션으로서 좀 지내고 나니 꽤 짜증났어요, 왜냐면 우리는 그리 많이 일할 수 없었거든요. 가끔은 하루에 2시간만 일하고, 저녁되면 할일도 없으니 커피샵에 둘러 앉아 시간을 때우기도 하고 일을 좀 하는게 좋겠다 싶었어요. 전 여전히 작곡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두 대의 리복스 레코더를 사왔어요. 스테레오인걸로요, 그리고 저한텐 엄청나게 작은 믹서가 있었어요. 작은 에코 이펙터도 달려있고... 취리히의 기술자가 절 위해서 만들어 준거에요. 딜레이는 없지만 리버브는 있었고, 그거 말고는 마이크랑 기타, 베이스가 있었죠. 그렇게 제 곡들을 녹음하기 시작했어요. 하나 녹음하면 복사하고, 또 복사하고, 뭘 추가하고, 앞에서 뒤로... 그렇게 2년 동안 작업을 하다보니 꽤 잘하게 되더군요. 작업 속도가 무척 빨라져서 작업을 마친 곡도 한두곡 생겼고 음반사랑 계약을 한번 해봐야 겠다 싶어서 그 두 세곡을 이탈리아의 제 친구한테 보냈더니 친구가 "뭐... 곡은 그닥 좋지 않군. 하지만 자네에게 엔지니어 일자리는 줄 수 있네." 라기에 저는 "좋아, 내가 뭘 해야하나? 뭘 할 수 있겠나?" 그랬더니 "음, 일단 와보게.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나?" 라고 해서 저는 엔지니어 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달 쯤 지나고 나서 엔지니어를 관뒀고- 왜 관뒀냐면 엔지니어는 작곡가가 되기 매우 힘들겠다는걸 깨달았거든요. 거기 사람들이 절 작곡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질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난 관둘꺼야, 사는데 충분한 돈도 있고 말이지" 라고 했죠. 그게 제 삶에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한 두 세달쯤 뒤에 제 첫번째 히트곡이 생겼거든요. 저는 그때쯤 라디오 룩셈부르크를 아주 많이 들었어요. 몇몇 미국 음악, 영국 음악을 소개해주는 유일한 방송국이었거든요 전 엘비스 프레슬리에 많이 빠져있었고, 그리고 그때쯤 버블검(버블검 팝, 60년대 장르인데 비틀즈 초기 생각하면 됨)을 참 좋아했었죠. 예를 들면 저의 영웅들중 하나인 "Ohio Express"란 그룹같이 말이죠. Yummy Yummy Yummy I love- 뭐 그런곡 말이죠. 그래서 제목이 "Looky Looky" 라는 곡을 썼어요. 제가 작곡했지만, 제겐 뛰어난 뮤지션들이 있었죠, 스튜디오에, 프로들과 함께 말이죠. 그게 꽤 히트를 쳤습니다. 프랑스에서도 히트치고, 이탈리아에서도 크게 히트치고, 스페인에서도 히트에 1위먹고, 벨기에... 그리고 그게 제가 버블검 장르로 친 첫 히트곡이 되었죠.

당시 독일엔 이미 디스코덱이 세워져 있었어요. 69년에서 70년쯤에. 그래서 전 차를 몰고 디스코텍에 가서 한... 30분씩 노래를 부르곤 했죠. 아마 한 7~8곡 정도를 부른것 같아요. 가끔은 차에서 자기도 했고요. 집까지 운전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게 거의 2년정도 도움이 됐죠. 초창기에 살아남는데...

열아홉살 때부터... 기억하기로 스물 일곱, 스물 여덟쯤 까지 그렇게 공연했어요. 그룹은 기본적으로 저와 남자 둘에, 피아노랑 드럼이 들어가고 전 기타였고, 두세달씩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을 했죠. 그리고 하나 기억나는게 우리가 생모리츠(스위스에 있음) 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듣기로 존 레논이 호텔에서 쉬고 있다는 거에요. 당연히 우리는 레논을 만나보려고 별 짓을 다 해봤죠. 초대도 해봤는데 결국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우릴 보러오지 않았으니 저도 존 레논을 본적이 없죠. 하지만 듣기는 했어요. 왜냐면 우린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우리는 작은 방에서 묵고 있었죠. 그 사람은 아마 좋은 스위트 룸에 묵었을 테고요. 그러던 중에 존 레논이 작곡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존 레논이 징- 징 징- 하면서 기타치고 노래하던게 기억나는데, 그렇게 며칠 저녁을 그가 작곡 하는걸 들을 수 있었어요. 그 곡들중에서 어떤 곡이 히트곡이 됐을지- 아마 한곡 정도는 히트곡이 됐을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벽을 통해 비틀즈의 일부가 작곡하는걸 듣는건 꽤 흥미로웠답니다.

그리고 70년대 초반에 베를린에서 활동을 계속했고, 그러다 나중에 베를린이 봉쇄되고- 당시에 베를린에선 30분 이상 운전할 수 없었다는거 아세요? 베를린이 장벽으로 둘러싸이고 나서... 동독쪽에요. 베를린을 자주 드나들 수 없었어요. 너무 돈이 많이 들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그때 상황은 정말로 폐쇄공포증에 걸릴것만 같았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었거든요. 그러다 어느날 아리올라 레코드의 사장이 절 보러 제 작은 집에 왔었어요. 주방에 작은 스튜디오를 차려놨는데 그 사람이 그걸 보고는 정말 감명 받아서는 저한테 "저희와 작업을 해주셨으면 하는데 뮌헨으로 이사오시면 1000마르크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아주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라고 했고 그대로 베를린을 떠났습니다. 네. 그게 71년도인가.. 아마 그때쯤이죠.

그렇게 아리올라 레코드에서 프로듀싱을 맡게 됐고, 거기서 몇몇 마이너 히트곡을 만들기도 하고, 아주 별로인걸 만들기도 하고... 몇 곡 들어보면 창피해지고 막 그러는데 하지만 돈이 좀 생겨서 꽤 행복했어요. 그때 제가 마이클 홀름과 같이 작업해서 냈던 곡 Mendocino는 100만장 정도 팔리기도 했죠.

70년대에 Arizona Man을 작업할때는 당신이 신디사이저라고 부를 법한게 있었어요. 이렇게 작게 생겨가지고, 금속제에, 막대기랑 아주 얇은 키보드가 있었는데, 연주해보면 공- 삐- 뚜- 뚜뚜- (사인음) 그건 무그가 나오기 전의 물건이었죠. 그리고 제가 그르르따따따따- 그르르따따따따- (Arizona Man 도입부)하는 부분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제 음반에 처음으로 들어간 신디사이저 음이었죠.

그래서, 제가 Son of my father란 곡을 녹음 할 즈음이 바로 무그 신디사이저가 출시될 쯤이었어요. 그게 71년도였나? 웬디 카를로스의 앨범 Switched-On Bach를 들었을때가 기억나는데, 전 신디사이저의 소리가 마음에 들었어요. 제 친구가 말해주길 뮌헨에 무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거에요. 그때는 전세계에 무그가 딱 2대밖에 없었는데 1대는 미국에 1대는 독일에 있었어요. 아무튼 그 사람은 뮌헨의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Eberhard Schoener였고요. 그래서 그 분 집에 갔더니 큰 스피커 4대와 거대한 무그 신디사이저에 온갖 케이블이 연결되어있고 조명에... 아주 환상적인 세팅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그는 곡 하나를 연주했죠.

세르쥬 갱스부르 je t'aime moi non plus 9:35초